“김수영 시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번역이라는 파인더”
이 책 <시인의 거점: 김수영 번역평론집>은 김수영 시인이 번역한 평론들을 발표 순서를 따라 모아 놓은 것이다. 여기 실린 글들의 발표 시기는 1957년에서 1966년까지 10여년에 이른다. 이 책을 ‘김수영 번역평론집’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했지만 물론 이 책에 평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글은 단상적인 글도 있고, 에세이도 있고, 문학의 주제를 넘는 예술 장르도 있으며, 또 인터뷰나 대담의 형식을 띠는 글도 있다. 여기 모아진 글 이외에도 김수영의 번역문은 다양하고 많은 양이 있지만 우선 문학예술에 대한 비평적 성격의 글들을 선별하여 묶은 것이다.
<시인의 거점>에는 토마스 만, 엘리엇, 파스테르나크, 사르트르, 까뮈, 헤밍웨이 등 대문호들을 비롯하여 매클리시(Archibald MacLeish), 블랙머(Richard Palmer Blackmur) 등등의 당대 문학인들까지의 예술론과 비평 30편을 수록하였다. 이 목록들은 김수영이 단순히 식민지시대, 해방과 국가 건설, 전쟁, 독재정치 등으로 참혹하게 얼룩진 아시아 변방의 한 시인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김수영은 스스로 당대 세계 문학예술 지도를 그려나가며 자신의 좌표를 찾아 견고한 토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 자신의 문학을 형성시켜 놓고 있었음을 말이다.
이 책의 제목 ‘시인의 거점’은 김수영이 번역한 평론의 제목 ‘아마츄어 시인의 거점’에서 가져온 것이다. 김수영의 아주 잘 알려진 진술은 이 제목에 안성맞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김수영은 자신의 ?시작노트 6?에서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거점’을 김수영의 번역 작업에서 알아보는 일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시인의 거점’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과 관련되는 것이 당연하다. 번역과 시는 당연히 다른 작업이지만, 또한 내적 연관성이 필연적으로 맺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김수영은 그의 언어 작업이 이중 언어 세대로서의 고충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이곳저곳에서 밝혀 놓은 바 있다. 하나의 언어와 또 다른 언어가 가진 의미론적 유사성은 일종의 미메시스에 해당하는데, 의미론적 유사성과 미메시스를 한데 엮어 이야기한 사람은 벤야민이었다. 김수영은 그의 시가 발표된 잡지의 지면에 함께 수록된 벤야민의 ?번역자의 과제?를 읽어 보았을 것인데, 벤야민에 대해서는 그는 이 책에 수록된 번역글 ?맑스주의와 문학비평?을 통해 재차 확인하고 있기도 하다. 그 벤야민의 언어론이 부분적으로 김수영에게 미쳤을 영향을 생각해 볼 때, 언어와 언어를 이중적으로 사용해야 했을 정신적 상황이 ‘시인의 거점’이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의 번역은 그의 시의 거점이다.
만약 김수영의 저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땅의 많은 시인이나, 김수영 시 연구자, 또 김수영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그야말로 비밀한 즐거움을 엿볼 수 있는 독서를 제공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