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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이 알아주는 나

나만이 알아주는 나

  • 송혁기
  • |
  • 글항아리
  • |
  • 2021-05-31 출간
  • |
  • 390페이지
  • |
  • 153 X 218 mm
  • |
  • ISBN 9788967359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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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18세기 개인의 발견’ 시리즈는 신유한, 조귀명, 이용휴, 유한준의 생애를 비평적 시각으로 조명한다. 동아시아에서 ‘개인’에 대한 사유는 전국시대 양주 이래로 시대 전환기마다 출현해왔다. 당대의 지배적 가치관에 동의 못 하거나 이질감, 소외감을 느끼는 순간 개인은 공동체와 거리를 두며 자기만의 느낌, 감정, 생각을 일구어나갔다. 이 시리즈는 그중에서도 자주 거론된 북학파가 아닌, 또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사유를 모색한 네 인물을 다룬다. 특히 조귀명趙龜命(1693~1737)은 질병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기만의 문장을 발전시켰고, 탈주자학적 문예 의식을 표방했으며, 시대의 주류 사상을 거스르는 데 있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행보를 보여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평전은 학계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전모를 가능한 한 드러내려 시도한다. 첫째, 그의 문집은 그동안 번역되지 않아 몇몇 논문들을 통해서만 논의됐고 뛰어난 글들은 아직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특히 일반 독자들이 그에게 접근할 통로는 거의 없었다. 둘째, 그의 문장은 매우 참신하고 새로워 오늘날의 시선에서 재조명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저자는 조귀명이라는 낯선 이름을 1990년대 초반에 처음 접한 후 10여 년이 지나 18세기 산문 논의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더 본격적으로 읽었고, 다시 10년이 지나 조귀명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즉 그를 알게 된 지 거의 30년 만에 이 평전을 완성하게 됐다.
평전의 시작은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작업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기에 4년여 간 그의 문집을 읽었다. 그리고 그의 문학을 주제로 여러 후학과 토론을 거치고 또 답사를 다니면서 평전의 모양새를 점점 갖춰나갔다.
이 책의 장점은 이름난 18세기 인물이 아니라 거의 다뤄지지 않은 인물을 본격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면서 1차 자료도 많이 제시한다는 데 있다. 특히 소설이나 시가 아닌 산문 작가로서 인물을 조명함으로써 그 시대의 특징을 드러낸다. 조선 후기 산문은 실용적 쓰임새를 뛰어넘어 심미적 행위로 나아갔다. 그의 문집 『간천고乾川藁』에 실린 대부분 산문은 개별 작품 하나하나에 품평을 받아 당대에 이미 집단 비평이 이뤄진 작품들이다.
조귀명은 많이 아팠던 사람으로, 질병이 그의 삶을 평범성과는 멀찍이 떨어뜨려놓았다. 그는 방 안에서 혼자 고통을 삭이면서 남과 다른 관점으로 깨달음을 추구함으로써 대체되기 힘든 자신만의 문학을 이룬 작가다. 오늘 내가 보는 것은 과연 나의 눈으로 보는 것이며 내가 듣는 것은 과연 나의 귀로 듣는 것일까?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욕망하고 달려가는 목표는 과연 나의 머리와 마음에서 나온 것일까? 300년 전에 떠난 그를 만나면서 독자들은 이 질문을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던지게 될 것이다.

서문을 받지 못한 문집

45년의 길지 않은 생을 살다 세상을 등진 조귀명은 문과에 급제하진 못했지만 당대에 문장가이자 비평가로서 이름을 널리 떨쳤다. 그는 김광국의 『석농화원』에 실린 신사임당의 그림에 제화를 썼을 뿐 아니라 정선, 윤덕희, 심사정, 윤용, 이인상 등 당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친 화가들의 그림과 윤순 등의 글씨에 제발을 달기도 했다. 그는 44세의 나이에 자기 글을 모아 추리면서 문집을 펴내려 준비했고, 세 명의 젊은이에게 서문을 부탁한다. 청탁받은 이들은 황경원, 이천보, 남유용으로, 모두 조귀명보다 열다섯 살 이상 어렸고 아직 관직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이 세 사람 모두 서문을 쓰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리고 이듬해, 조귀명은 급작스레 세상을 떴다. 비탄스럽게도 서문을 모조리 거절당한 문집, 이듬해의 사망, 조귀명의 청을 거절한 황경원이 꿈속에서 마음 아파하며 조귀명의 영령을 만나는 일, 문집 서문이 아닌 묘지명을 쓰게 된 일로 이 책은 삶에서 어긋났던 서로의 관계가 죽음으로 인해 단단히 맺어지는 일로 서두를 연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다섯 해 되던 해에 나는 청계산에 올라 공의 묘소에 조문하였다. 열두 해 뒤 경주 부윤으로 나갔을 때 나는 공의 문집을 판각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내가 공을 가장 깊이 알고, 죽을 때까지 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황경원이 묘지명 앞에 붙인 서문)

조선의 지식인들은 문집을 만드는 데 꽤나 공을 들였다. 죽은 뒤 남겨지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글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그런 문집에 서문을 받는 것은 권력과 이름 있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인정받는 길이었다. 하지만 조귀명이 서문을 부탁했던 세 젊은이는 아직 사회적 지위나 학문적 업적을 이룬 게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무례함을 무릅쓰면서까지 손을 내저었던 것일까. 사실 여기에는 당시 노론계-소론계의 대립이 어려 있었고, 주자성리학에 대한 입장 차이, 불교적 사유와 글쓰기에 대한 우려 등 복잡다단한 요소들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조귀명으로서는 거절로 인해 자기 사유와 글쓰기를 거둬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단적 사유, 유불도의 통합을 통해 그는 이미 시대의 관성과 사고를 뛰어넘어 자기만의 문장을 획득했노라 자부했기 때문이다.

질병은 어떻게 새로운 길을 내었나

소론계의 명문 풍양 조문의 자제로 태어난 조귀명에게는 평생 남들보다 열등하게 지내야 했던 약점이 있었다. 바로 열 살 무렵부터 기이한 병에 걸려 평생 질병 속에서 몸을 사리고 우울한 날들을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나는 병과 함께 태어났고 병과 함께 자라서, 일찍부터 병에 대하여 묵묵히 알아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 마음으로 즐기는 것과 일삼아 경영하는 것 어느 하나 병 때문에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 평소 우울하게 지내며 스스로 위안할 것도 없었다.”(「병해病解」)

7세에 스스로 한문을 깨우치고 13세 때 과거시험장에서 대책문을 순식간에 써내려간 일로 유명했던 그이건만 병약한 신체는 문과 급제의 꿈을 접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아져 잠깐 바깥을 나들이할 때를 제외하면 내내 방에서 자리보전하며 스스로를 보살펴야 했다(30세에는 구안와사를 앓아 칩거하다시피 했다). 이때 그가 탐닉하게 된 것이 그림과 글씨, 문학이었다. 조귀명은 23세에 이미 유가, 불교, 노장의 서적들을 대략 살펴봤다. 20대에 쓴 글에 장자의 표현이 자주 나타나며, 38세에는 『노자』에 대한 독후감을 짓기도 했다. 또한 주자성리학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그는 문장 공부의 전범으로 『능엄경』을 꼽았으며, 『원각경』의 간결하고 절묘함과 『유마경』의 웅장하고 분방한 문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아가 『춘추좌씨전』과 『사기』를 열심히 읽었으며, 소식의 문장을 흠모해 문학적 지향점을 그에게 두었다. 뿐만 아니라 조귀명은 역사서 읽기에 몰두해 「독사讀史」라는 글을 짓는 등 30세 이전에 이미 폭넓은 정신세계를 형성해가면서 거대 담론에 관해 쓴 글도 여러 편 되었다.
이것은 모두 그가 오로지 방 안에서 책과 글씨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부모가 배려해준 덕이었고, 주류에 속한 다른 이들처럼 과거 공부나 심성 수양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이러한 독서는 특정 주제에 대해 그가 자신의 입장을 뚜렷이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로써 그는 강한 지적 자의식을 형성해갈 수 있었다. 당대에 허황한 이야기로 취급되던 『산해경』을 열심히 읽었고 텍스트 비평까지 가한 것만 봐도 그의 독특한 면모를 알 수 있다.
그는 글씨보다 문장이 중요하고, 문장보다 도道가 중요하다는 일반론을 부인하진 않았지만, 취미나 습관의 영역에서 자신처럼 문장과 글씨에 빠지는 것이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사실 당대 사람들은 조귀명이 노불의 도에 빠져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는데 이에 대해 그는 당당히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저 역시 성인이 되는 길이 있다는 거야 잘 알지요. 하지만 구구하게 문장 좋아하는 취미를 떨치기가 이렇게 어렵네요.”

나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나밖에 없다

당대에 아무도 서문을 써주지 않을 만큼 진가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지만, 조귀명은 바로 그 점이야말로 자기 시대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고 귀한 자질임을 치열한 독서와 문장 속에서 입증해갔다.
모두 당연시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환기시킴으로써 고정관념의 허를 찌르고 새로운 깨달음을 던지는 사유 방식 및 표현 기법은 조귀명이 스스로 확립했던 바다. 당시에는 당송고문을 전범으로 삼던 이들과 선진·양한 고문을 배우자는 주장이 두 파로 나뉘어 대립 양상을 보였다. 특히 앞쪽은 문장가이면서 성리학에 충실했던 김창협을 중심으로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조귀명은 양쪽 다 경계하며 산문의 문예미를 추구해나갔는데, 특히 지난 시대 성대했던 문장을 지금에 와서 따르려 애쓰기보다 지금 나의 문장을 하면 된다는 논지를 펼쳤다.

“다만 내 식견과 깨달음을 기준으로 그것들을 살펴보아서 맞으면 취하고 맞지 않으면 버릴 뿐입니다. 요컨대 천고의 학술과 문장이 나에게 재단되어야지 그것들이 나를 재단할 수는 없으며 나에게 부려져야지 그것들이 나를 부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나는 나의 말을 말하면 그뿐이지, 남이 나에게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말은 물론 옛글의 섭렵과 조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섭렵 역시 나의 견식을 위해 활용할 자료로서 중시되며, 전범의 설정과 학습 자체는 ‘나의 견식해오見識解悟’를 중심으로 상대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그 말을 하기 전에는 모두 그런 이치가 있는 줄도 몰랐다가 자신의 말이 나오고 나서야 이로써 그 이치가 있게 되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조귀명의 앎은 말하자면 교화와 경세에 보탬이 되겠다는 전통적인 효용 가치와는 달리 삶의 구체적인 국면에서 스스로 깨달은 ‘자득自得’을 기준으로 했다. 이는 식견에 ‘진실성’만 있다면 이치의 옳고 그름마저 상대화할 수 있다고 여긴 점에서 당시의 문인들과는 큰 간극을 보였다.

***
45년의 생애 동안 조귀명이 역사에 새긴 발자국은 많지 않다. 탕평을 주도한 소론계 가문의 자제로서 문학 분야에서 이름을 빛냈고, 영조의 세자 시절 장명 직분을 수행했으며,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동몽교관, 세자익위사 등을 역임한 정도다. 하지만 그의 문학이 아무리 당대에 참신하고 독보적이었던 것이라 해도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까. 조귀명의 글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가 조선 후기 개별적인 인식 주체로서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다시 보고 자신의 언어로 깨달음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는 글들에서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즉 극심한 아픔에서 출발한 역설의 논리로 가치를 상대화시키고 나 자신의 관점을 하나 보태는 것, 이것이 그가 조선 역사에 남긴 하나의 작지만 커다란 자취일 것이다.


목차


머리말

1장 투병 속에 문학을 꽃피우다
1. 서문을 받지 못한 문집
꿈속의 영령이 건넨 한마디 말 | 서문을 써주지 않은 이유 |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 서문은 받지 못한 채 떠났지만
2. 책과 서화에 빠진 병약한 젊은이
청교의 명문가 자제 | 집안의 경영자, 어머니 심 부인 | 병약한 영재로 자라다 | 젊은 날의 독서와 글쓰기 |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마주하다 | 나를 아는 이 누구일까
3. 산수를 유람하고 교유를 넓히다
과거 응시의 뜻을 접다 | 서울에서 함양으로, 다시 청풍으로 | 교유를 넓히고 문학을 논하다
4. 세상에 나서자마자 세상을 떠나다
형님을 잃고 다시 서울로 | 천거로 세상에 나가다 | 마음은 금강산을 노닐건만 | 갑작스러운 죽음, 그 이후

2장 폐쇄적 탐닉과 문학적 자부 사이
1. 늘 곁에 있는 병과 죽음을 사유하다
병과 함께 태어나서 병과 함께 살아가다 | 너무 이른 죽음에 던지는 질문 | 의원에게 보낸 편지 | 죽음의 슬픔에서 건져올린 문학
2. 서화를 만지다, 마음을 만지다
신사임당의 포도그림 | 몰래 서첩 감추는 아이 | 취미는 취미일 뿐이다 | 조선의 서화를 평하고 꿈꾸다 | 그림에 쓰다, 글로 그리다 | 대상을 닮은 그림, 대상을 넘어선 그림 | 물아物我와 진환眞幻의 경계를 넘어
3. 나의 생각으로 문학을 논하다
산문을 전공으로 삼은 비평가 | 조선의 산문, 무엇이 문제인가 | 문학적 전범은 필요할까 | 도문일치道文一致의 관념을 부정하다 | 자신만의 깨달음을 담는 것이 문학이다 | 그래서 나는 이렇게 쓰련다

3장 주어진 진리가 아닌 나만의 깨달음으로
1.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늘 곁에 있지 않기에 소중하다 | 내 마음에 맞는 길에서 만나는 새로움 | 나의 뜨락은 작지 않다
2.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은 과연 당연할까 | 한 걸음 더 내딛어 열리는 시야 | 역사를 읽다, 역사로 들어가다 | 역사 속에서 역사를 평하다
3. 이단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단, 세계를 읽는 또 다른 길 | 이단의 성인聖人, 노자 | 격분한 유자가 논하는 마음 | 불가와 유가가 만나는 자리 | 말 없는 말과 글 없는 글 | 마음 깊은 곳의 불교

4장 살아 있는 언어로 나의 문학을 이루다
1. 문장가로 살아가기
아버지의 꿈 | 청탁과 대작, 그리고 공적인 글쓰기
2. 붓끝에서 살아나는 인물 형상들
대책 없이 매력적인 사람 | 그의 삶에 나의 삶을 담다 | 평범한 이의 비장한 아름다움 | 적군마저 감동시킨 열사 | 이 사람을 어떻게 평할까
3. 오래된 가지에 새 꽃을 피우다
상투적인 표현을 경쾌하게 뒤집다 | 거문고의 꿈, 거북이의 꿈 | 의례적인 문체에 새로움을 담다 | 관수觀水와 애련愛蓮을 넘어 달관으로
4. 여기 간천자가 있음을 알게 하리라
조귀명, 그를 기억하는 이들 | 홀로 우뚝 선 간천자 | 오늘의 자운을 위하여

주註
동계 조귀명 연보
저작 연도에 따른 작품 목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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