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화연구의 고전
레이먼드 윌리엄스(1921~1988)는 웨일스 출신의 문화비평가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이 책 『기나긴 혁명』(1961)은 『문화와 사회』(1958)와 더불어 ‘문화 분석’의 모델로 평가받는 명저다. 당대에 윌리엄스는 에드워드 P. 톰슨과 함께 신좌파 문화 이론가를 대표했으며, 리처드 호가트, 스튜어트 홀이 이끌던 버밍엄대학 현대문화연구소(1964년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을 통해 ‘문화연구’는 독립적인 학문분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그 개척자가 바로 레이먼드 윌리엄스이다.
한국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책은 이미 198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으나 주저인 『기나긴 혁명』 초역본이 나온 것은 2007년에 와서였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새로운 장정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마침 2021년은 레이먼드 윌리엄스 탄생 100주년이자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번역자인 성은애 교수(단국대 영미인문학과)는 초역본의 오류나 누락된 부분 등을 바로잡고, 만연체 스타일의 원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가독성을 높이려고 거의 모든 문장을 다시 점검하며 세심하게 다듬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언론, 출판, 문학, 교육 등을 거대한 커뮤니케이션의 연결망 속에 배치하고, 이러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공동체의 사회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평생 탐구했다. 『문화와 사회』『기나긴 혁명』『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지는 ‘문화 3부작’은 문화적 형식과 개인의 사회화, 그리고 공동체와 계급, 자본주의 체제의 관계를 다루었으며, 그중 『기나긴 혁명』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문화연구를 새롭게 정립하고 그 실천적 가능성을 모색한 저서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문화의 정의와 창조성의 본질, 개인과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문화연구의 기초를 제공한다. 2부는 기존의 역사서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던 교육, 출판, 언론 등 주요 문화적 제도의 발달과정을 분석한다. 3부는 결론 격으로, 영국 사회를 대상으로 한 ‘기나긴 혁명’의 사례 연구이다. 여기서 저자는 현대 영국의 문화적·정치적 지평을 분석하면서, 문화와 사회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발전 단계를 모색한다.
문화와 대중의 관계를 밝히는 문화비평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기나긴 혁명』에서 문화의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 범주가 있다고 밝힌다. 첫째, 문화는 어떤 절대적 또는 보편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인간의 완벽함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나 그 상태라는 것이다. 둘째, 문화는 ‘문서화’된 기록들, 즉 기록된 텍스트와 실천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문화는 인간의 생각과 경험이 구체적인 방법으로 다양하게 기록된 지적·상상적 작업의 유기체이다. 셋째, 문화에 대한 ‘사회적’ 정의로, 이때의 문화는 특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묘사를 말한다. 이 세번째 정의야말로 문화연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사회적’ 정의는 문화를 생각해보는 새로운 방식을 열어주었다. 윌리엄스는 리처드 호가트, 에드워드 톰슨 등과 함께 대중의 삶을 ‘문화’로 정의하고 그것은 결코 귀족들의 것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보았다. 문화는 ‘일상의 삶’이며 사람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통해서 사고하고, 행위하고, 이해하면서 끊임없이 자신들의 의미를 재생산하고 재구성해가는 것이다. 또한 대중문화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스스로 자신들의 의미를 생산해내고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확대하는 것이다.
한편, 윌리엄스가 “한 시대의 문화”로 규정하는 것은 ‘감정 구조’이다. 한 세대의 독특한 문화는 그 시기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집단적 경험과 가치 및 정서의 총합체인 특수한 ‘감정 구조’에 의존한다. 문화 분석의 목적은 광범위한 자료를 통해 한 세대의 문화를 결정하는 ‘감정 구조’를 읽어내는 것이다. 예술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 구조의 특성이 그 시대의 예술에 섬세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제3의 혁명, ‘문화혁명’
윌리엄스는 권력의 속성과 공동체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꾼 민주주의 혁명도, 기술 발달로 경제체제가 변화한 산업혁명도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정치·경제 혁명과 긴밀히 얽혀 있는 제3의 혁명, 훨씬 더 점진적이고 광범위한 혁명이 일어나는 중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이 ‘기나긴 혁명’은 사회·경제·정치 제도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혁명이다. “이 심오한 문화혁명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우리 삶의 경험을 이루는 대부분이며, 예술과 사상의 세계에서 매우 복잡한 방법으로 해석되고 쟁취되는 것이다.”(14쪽)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 혁명, 산업혁명, 문화혁명을 별개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현대사회의 급격한 변화과정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문화도 점점 시장경제에 종속되어간다. 윌리엄스는 자본주의의 목표가 사회적 효용이 아닌 이윤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문화적 측면에서 시장의 결정을 넘어서는 공익적 결정과 민주적 통제를 주장하며,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체제처럼 문화를 관료의 손에 내맡겨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투기꾼과 관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 같다. 우리는 투기꾼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관료가 딱히 더 매력적이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에너지는 소진되고 희망은 약해지며 현재 투기꾼과 관료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은 도전받지 않은 채로 남는 것이다.”(428쪽)
윌리엄스가 말한 현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문화는 더욱 산업화되었고, 그 와중에 자생력을 잃은 비상업적인 문화 생산자들은 공적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기나긴 문화혁명 속에서 그래왔듯, 개인과 대중은 다시 새로운 제도, 새로운 표현양식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 제3의 길을 찾아나갈 것이다. 『기나긴 혁명』은 이를 위해 우리가 참조해야 할 풍부한 사례와 조언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지침서이다.